기산도는 일제강점기의 암흑 속에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가다. 그는 단순히 무기를 든 의열단원이 아니라, 부상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념을 지키며 싸운 강인한 투사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2003년 10월에 입은 치명적인 다리 부상으로 절름발이가 된 이후에도 그는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상은 그의 투쟁 정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의열단 내부에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기산도의 부상 경위, 그 이후에도 이어진 무장 투쟁, 그리고 오늘날 그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한다.
기산도
기산도가 부상을 입은 사건은 그의 독립운동 경력 중 가장 극적인 전환점이자, 그를 '절름발이 투사'로 기억하게 만든 계기였다. 당시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의열단과 연계하여 일본의 주요 요인 암살 및 기관 폭파 계획을 세우던 중, 일제 정보기관에 그 동선이 노출되었다. 2003년 10월, 상하이 황푸구 근처에서 일본 헌병대와 마주친 그는 짧은 총격전 끝에 오른쪽 다리에 총탄을 맞았고, 이 부상으로 인해 정강이뼈가 부러져 평생 절며 걷는 장애를 안게 되었다.
당시 의열단 내부에서는 기산도를 후방으로 돌리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이 “더 이상 몸이 빠르지 않으니, 총과 전략으로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그는 물리적 행동이 어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 투쟁 계획을 짜고, 후방 정보수집과 선전활동까지 담당했다. 단순한 전투원이 아닌 전술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난 시기이기도 하다.
그의 부상은 육체적으로는 큰 고통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동지들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다. 의열단원 중 일부는 그를 “살아있는 순국선열”이라 부르며, 그의 용기를 본받아 더 치열한 싸움을 이어갔다. 실제로 부상 이후 기산도가 참여한 투쟁 중 상당수는 기습성과 정밀성 면에서 이전보다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그가 머리로 싸우는 법을 익혔기 때문이며, 그가 단순한 무장투사에서 전략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부상 이후 그의 외형적 특징인 절뚝이는 걸음걸이는, 의열단 내부뿐 아니라 외부 인물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훗날 ‘절름발이 기산도’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의 인물사적 상징성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투사
기산도는 의열단의 핵심 멤버로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작전의 기획과 실행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특히 부상 이후에도 그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조직 내부의 지휘 체계 안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단순히 전면에 나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수집하고, 전략을 수립하며, 때로는 신입 단원들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을 이끌어갔다.
그가 작성한 폭탄 제조 매뉴얼은 훗날 의열단 내부뿐 아니라 다른 항일 조직에서도 활용되었으며, 일본군의 심리적 공포를 극대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그가 단순히 행동으로만 싸운 것이 아니라, 지식과 전술, 심리전까지 포괄하는 전방위 투쟁을 전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기산도는 조직 내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슬로건을 앞장서 실천한 인물이다. 실제로 동료들이 체포되거나 순국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았고, 늘 단원들을 먼저 챙겼다. 그는 스스로를 "전투가 끝난 후에도 남아 조직을 지킬 사람"이라고 칭하며, 후방에서 조직 정비와 무기 조달을 도맡았다. 특히 상해, 천진, 북경 등지의 무기 밀매상을 통해 화약과 탄약을 확보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이는 후속 작전 수행에 있어 큰 기반이 되었다.
기산도는 단순한 폭력적 무장 투쟁이 아닌, 민중의 의식을 깨우는 선전 활동도 매우 중요시했다. 그는 '독립이 없으면 존엄도 없다'는 문구를 벽보에 새기고, 이를 각지에 뿌리는 활동도 이어갔다. 이처럼 그의 투쟁은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심리적, 정신적 차원의 독립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역사
기산도의 활동은 20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 중 하나로 분류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대중의 관심에서는 다소 멀어져 있었다. 이는 당시 기록의 부족과 정부 차원의 보훈 시스템 미비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국가보훈처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재조명 사업이 진행되며, 기산도 역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3년 당시 사건을 중심으로 한 연구자료와 가족들의 구술 기록, 의열단 내부 회의록 등이 발굴되며 그의 활동 전모가 서서히 드러났고, 학계에서는 그를 ‘전술가형 의열단원’이라는 새로운 틀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또한 절름발이라는 그의 신체적 조건이 독립운동에 어떤 상징성과 영향을 미쳤는지도 주요 연구 주제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기산도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이 제작되어 KBS와 EBS에서 방영되었으며, 일부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그의 이름이 수록되었다. 이는 단지 역사적 복원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앞으로 기억해야 할 '숨겨진 영웅'을 발굴해내는 과정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더 나아가 그의 삶은 현대 대한민국 청소년들에게도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몸이 불편함에도 나라를 위해 싸운 그의 삶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정신력”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사회적 도전들에도 응용할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 된다.